회사가 사무실을 신사로 옮긴 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나간다. 이사 전에는 공덕의 공유 오피스에서 한 달 정도 지냈다. 최근에 직장 동료와 새롭게 발견한 근린 공원을 거닐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동료A "분명히 공덕에서 있었던 시간이 훨씬 짧은데, 오히려 거기에서 좋았던 기억이 더 많은 거 같아요. 되게 오래 있다가 이사온 느낌이랄까?"
마침 유현준 교수가 자신의 책 <공간의 미래>를 소개하는 토크쇼에서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우리에게 발코니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며 '공간은 단순히 수치적인 의미가 아니라, 공간이 가진 '기억의 총합'을 의미한다'는 말을 했다. 작은 공간이라도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나만의 작은 발코니가 있다면, 창문 하나 없는 회색빛 널따란 공간보다 심리적으로 더 다채로운 기억들이 머릿속에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공덕에서는 공유 오피스였던 덕분에 다양한 공간을 무료로 활용할 수 있었고, 건물을 나와 횡단 보도를 건너면 수직으로 길게 연희동까지 이어지는 공원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종종 산책하던 그 기억들이 동료와 나에게는 지금의 훨씬 큰 회색빛 사무실보다 더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공간의 미래>를 통해 모든 공간, 건축에는 다 이유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환경, 사회, 문화, 정책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만들어진 공간이지, 허투루 만들어진 곳은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초래할 공간의 변화에 대한 유현준 교수의 설명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다.
공간이 가진 권력과 앞으로의 책임, 소셜믹스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원, 벤치, 도서관의 존재 등 앞으로 사회가 바람직하게 나아가기 위한 공간의 밑그림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나를 특히 인상깊게 한 부분은 '청년의 집 소유'에 관한 의견이었다. 지금까지만 해도 나는 서울에서 집을 사는 건 단념해야 한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런데 유현준 교수가 제시한, 칠레의 저소득층 주거형태인 '엘레멘탈'의 사례를 보니 어쨌든 대안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 청년들을 위한 현실적인 주택 마련안까지는 제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해외 사례를 언급해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래서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구름이 낀 상태로 끝난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가 활발해지고, 권력 관계도 느슨해지면서 사람들이 본인을 표현하는 수단도 달라지고 재화를 소비하는 형태도 다양해졌다. 이런 부분에서 'Why'를 판단할 때 나만의 카더라식 논리로 해석하기 일쑤였는데, <공간의 미래> 에서 유현준교수가 역사적 맥락, 본인의 경험, 해외 사례를 통해 논리적으로 이유를 설명해주니 덕분에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을 즈음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리하여 나는 이러한 세상에서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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