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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책

[책 리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by 여심지기 2022. 10. 10.

아오와는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쓰크루는 생각했다.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은 16년 만에 재회하는 옛 친구에게는 분명 짧았을지도 모른다. 나누지 못한 이야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쓰쿠루는 둘 사이에 나누어야 할 소중한 것이 더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같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게 여기서는 간단한 일이 아니야. …… 어이, 이런 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 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그렇게 말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 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단순한 삶의 방식이 내 성격에 맞는다는 건 확실해. 특히 인간관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몇 번씩 상처를 받았어. 가능하면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기 싫어.”

별일 아니야. 그는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일어난 일이고, 실제로 일어났다고 해서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물리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감긴 시계태엽이 점점 풀어지고 모멘트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워져서 이윽고 톱니바퀴가 마지막 움직임을 멈추고 바늘이 한 위치에 딱 멈춰 선다. 침묵이 내려온다. 단지 그것뿐이 아닌가.

만약에 사라가 나를 선택하고 받아들여 준다면 바로 결혼하자고 말하자. 그리고 지금 자신이 내줄 수 있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몽땅 내밀자. 깊은 숲에서 길을 잃고 나쁜 난쟁이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아카(赤), 아오(青), 시로(白) , 구로(黒) 와 다르게 자신의 이름에만 색(色) 이 없던 쓰쿠루는, 갑작스럽게 네 명의 무리에게서 배척을 당한 뒤 영문을 알지 못한 채로 십여년을 보내게 된다. 그날이후로 가슴에 큰 구멍 하나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 쓰쿠루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속도에 맞추며 이름 그대로 역을 ‘만드는’ 사람으로 운명 지워진 듯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사라라는 여인을 만나고 그녀에게 점점 더 호감이 커질 수록 그는 자신의 구멍 하나를 메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결정적으로 사라가 자신과의 관계의 발전을 위해서 네 명의 친구를 만날 것을 권유하고, 쓰쿠루는 이를 계기로 자신이 배척당했던 이유를 찾아, 순례길을 떠나게 된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색채를 잃은 사람들, 순례의 과정에서의 깨달음,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사랑하는 사라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사건. 등을 통해 쓰쿠루는 일련의 차갑고도 따뜻한, ‘성장’을 하게 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는 사라를 만나기 전 과 후, 순례를 떠나기 전과 후, 색채를 가진 네 사람을 15년 만에 만나기 전과 후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같은 곳에서 자고 일어나며, 매일 자기 전 커티샥 한 잔을 마시고 잠에 들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어떠한 형태로든 달라져 있을 텐데, 확실한 것은 그의 이름에는 없는 그 색이, 15년 전 그의 가슴의 큰 구멍을 낸 곳을 채우게 되리라는 것이다. 무채색이 아닌, 옅은 노랑 혹은 진한 갈색, 그런 것들. 색의 명도 채도 색상은 앞으로 쓰쿠루와 사라와의 관계, 그리고 그가 마주할 또 다른 복잡한 삶의 방식에 따라 밝기도 농도도 달라지겠지. 하지만 절대 색채를 잃어버리는 일 만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어쩌면 나는 한 독자로서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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